고창 역사 문학기행
-서정주 시인의 삶과 문학을 중심으로-
고창은 서해안고속도로가 완공된 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서울에서 294km,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호남고속도로 정읍IC로 진입하여
지루하게 국도를 타고 달려야 했던 곳이다.
고창의 발전은 특이하다.
공업화에 따른 발전이 아니라 역사문화관광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운사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유적, 청보리밭 ,고창읍성,
미당시문학관으로 이어지는 고창의 역사 문화적 기반은
어느 곳 보다 그 폭이 넓고 깊다.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의 판소리 고향으로 문화예술로서 손색이 없다.
선운사 도솔천의 가을
고창의 인물로 동학혁명의 총 지휘자 전봉준이 있다.
사람들은 전봉준을 정읍사람이라고 하지만 그의 고향은 고창이다.
동학혁명의 영웅 전봉준의 생가터가 고창군 고창읍 당촌리 63번지에 있다.
고속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지만 찾아 가기가 쉽지 않다.
1894년 3월20일(음력)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리 마을에 분노한 무장 농민
4,000명의 함성소리는 간 곳없고, 늙은 노인들만 서성이고 있다.
고창읍에는 신재효고택이 있다.
잘 보존된 고창읍성 아랫 마을에 누구에게든 신재효를 물으면 길을 안내한다.
일찍이 신재효 선생을 두고 가람 이병기선생은 그의 국문학 업적중의 하나인
판소리 이론 및 연출등의 업적을 ‘기적의 사업’이라 칭했다.
1812(순조12년) 11월6일 고창읍 읍내리에서 태어나 평생 판소리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22번 국도변에 있는 마을, 흥덕면에서
김소희 명창이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서편제의 명창 송만갑의 제자이기도 하거니와
춘향가 및 심청가를 부를 때 목소리가 피를 토하는 듯 가냘프고 섬세하였다.
백제 때 고창의 이름은 <모량부리현>이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경덕왕16년 고창현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1914년 일제에 의해 고창, 무장, 흥덕 세 고을이 행정개혁 개편이란 이름으로 고창군이 되었다. 한때 전라남도가 되기도 했다.
1955년 고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읍 13면이 현재의 고창군의 행정구역이다.
서해안고속도로는 당진의 서해대교를 넘어 군산을 지나고 나면, 이내 김제 만경평야다.
시야가 탁 트인 호남들녘을 지나다 보면 <선운사IC>기다린다.
이곳으로 진입하여 22번국도로 접어들면 선운사는 지척이다.
이 길을 달리다 보면 부안면소재지를 지나게 되고,
용산저수지를 왼쪽으로 끼고서 삼거리에서 우회전 하면 고개가 나타난다.
이 고개가 유명한 ‘질마재’다.
질마재 신화에 등장하는 신부(新婦)의 애절한 이야기가 슬픔이 되어 몽실거린다.
서정주 생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시인의 시 질마재 신화 중 <신부> 전문
멀리 줄포만이 보이고 왼쪽으로 <미당시문학관>이 보인다.
이곳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었던 선운초등학교가 폐교 된 곳을
시문학관으로 리모델링하였다.
학교터를 그대로 문학관으로 개관하였기 때문에 부지면적이 2,862평이나 된다.
전시실, 세미나실, 전망대및 서재 재현실, 다용도실등으로 디자인 된 공간은 깔금하다.
전시동 콘크리트 건물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는 건축물로서
자연적이며 친환경적인 것이 특징이다.
서정주의 고향마을 선운리에 콘크리트 6층 건물을 새로 지어 만든 문학관은
사뭇 범상치 않게 서 있다.
서울 남현동 자택에 있던 미당의 유품이 2001년 11월3일 개관을 위해 이곳으로 옮겨 왔다.
한 작가의 유품이 다양하면서 많이 전시되고 있는 것이 미당문학관의 특징이다.
사용하던 장롱까지 옮겨다 놓았으니 말이다.
아예 살림집을 옮겨다 놓은 듯하다.
이것은 그의 사후 1년 만에 문학관이 개관되었고 살아생전에 이미 서정주 시문학관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흘러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당시문학관의 6층 전망대에 오르면 질마재 및 생가를 훤히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왼편에는 미당의 생가가 오롯이 누워 있으며, 오른편 양지바른 곳에
그의 묘소가 오고 가는 사람을 보면서 앉아 있다.
오랫동안 문학기행을 많이 다녔지만 작가의 생가와 인접해 문학관을 포함한 자신무덤이
존재하는 사람은 서정주 시인이 처음이다.
선운사는 백제 27대 위덕왕24년(577) 검단 선사가 신라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개창했다.
도솔암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산자락에 진흥굴이 있다.
그의 아내 도솔과 딸 중애가 진흥굴 안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이 왕의 지위를 버리고 멀리 백제 땅 선운사까지 찾아와서
불공으로 정진했던 곳을 더듬거리는 일은 흥미롭다.
필자는 미당의 시집 <신라초新羅抄>(1961년)을 소장하고 있는데,
서정주 시인이 왜 시집의 제목을 <신라초>라 했을까 궁금해 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운사에 가서 그 해답을 얻었다.
서정주 시인에게 있어 진흥왕과 신라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1400년의 역사를 뛰어 넘어 고개를 하나 넘으면 만나는 사람이었다.
백제와 신라를 대립적인 구조로 볼 수 없었던 것은 서정주 시인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선운사
9월 고창 방문은 무릇꽃과 매밀꽃이 지천이다.
무릇꽃은 상사화처럼 생겨 남녀 간의 슬픔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선운사를 찾기 전 미당 서정주시인의 <동천>이란 시를 읊조리면서
그의 생가와 무덤가를 거닐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옯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 시인의 시 '동천(冬天)' 전문
<선운사 동구>란 시를 읽고 선운사 입구를 들어서면 숲길이다.
이 숲길을 따라 선운사로 가는 길은 계절에 상관없이 모두 아름답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 시인의 시 <선운사 동구>
미당 서정주시인(1915~2000)의 시 ‘푸르른 날’을 읽으면 가슴 설렌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싯구와 운율이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시인은 1915년 5월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동네 서당에서 한문수업을 받고,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하여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한 후 구속되기도 했다.
고창고보에 편입학 한 후 이후 자퇴하여 계속적인 방황을 했으며,
이 시기에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민족문제와 가난하고 천대받는 현상의 극복을 위해서
칼막스와 레닌의 사상에 도취되어 가죽구두도 벗어버리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직전에 직면한다.
이후 톨스토이의 “공정한 물질의 분배가 행복을 주겠는가?”라는 선언에
감동을 받아 사상의 자유로움을 강구한다.
이런 번민과 방황을 통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같은 해 김달진 김동리 김광균등과 더불어 ‘시인부락’이란 동인지를 만들어
시작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한다.
1938년 첫 번째 시집 ‘화사집’을 발간하여 원색적이며 악마적인 시풍으로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하며, 한국의 보들레르로 불려진다.
해방직후 보수문단인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한다.
생전에 1000여 편의 시를 15권의 시집에 담아 출간했으며,
그의 유품은 모두 1만5천여점이 고창에 있는 미당문학관에 기증되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5차례 추천되기도 했지만, 2000년 세상을 떠난다.
일제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행적으로
진보주의자들에게 비판을 받아왔다.
군부 독재자 선출과정에서 전두환 찬조연설, 대통령당선축하의 축시헌사,
전두환지지 발언 등도 문제가 되었다.
이런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토속어와 질펀하고 흥미진진한 언어구사와
신화적인 담시를 썼다.
■ 서정주 시인 연보
*1915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질마재)에서 출생
*1922년 질마재 서당에서 1924년까지 한학 수학
*1925년 줄포초등학교 입학
*1929년 중앙고등학교 입학
*1930년 광주학생사건으로 구속
*1931년 고창고등학교 편입학 후 자퇴
*1933년 중앙불교전문강원에 입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 벽’ 당선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 등과 ‘시인부락’ 창간
*1938년 첫 시집 ‘화사’ 출간, 방옥숙과 결혼
*1939년 북간도 양식주식회사 경리로 근무
*1940년 고창으로 귀환
*1941년 동대문여학교 교사 부임
*1946년 귀촉도 출간
*1948년 동아일보 문화부장 역임
*1951년 전주고교 교사
*1954년 서라벌 예대 교수
*1955년 서정주 시선 간행
*1960년 동국대학교 교수
*1968년 제5시집 동천 간행
*1972년 질마재 신화 간행
*1975년 떠돌이의 시 간행
*1983년 서정주전집 간행
서정주 시인 시비 <국화 옆에서>
■ 국화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시인의 시 <국화 옆에서>
서정주 시인의 대표시 <국화 옆에서>는 기승전결로 이어지며
다양한 고난과 시련을 경험한 후 얻은 삶의 원숙함이 주제이다.
이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국민들의 시이며 한국현대시를 대표하는 명시이다.
국화가 피는 과정을 통하여 모든 생명체는 고난과 시련을 당하며
태어난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 주는 시다.
이 시는 너무나 많이 알려진 시이기 때문에 거론하는 것조차도 꺼릴 절도이다.
그러나 시의 깊은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시라고 깔보기 때문이다.
이 시는 국화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을 세 개의 연에 배당하고 있다.
제1 . 2 . 4연이 이 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국화옆에서’를 시의 문맥으로 읽으려면,
제1 . 2 . 4연을 먼저 읽고 다음에 제3연을 읽어야 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제1연은 생명 탄생의 준비단계이다. 인생을 사계절로 나누면서 봄을 표현하고 있다.
국화의 개화(開花) 과정과 봄을 표현하는 소쩍새의 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쩍새'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의 상징어다. 그러므로 인생의 봄은 절망적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렸다고 쓰는 것은 문학이기에 가능하다.
비현실적며이며, 비과학적이다.
서정주 시인은 국화라는 아주 작은 생명체의 탄생에도 전 지구의 자연이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엄청난 자각이 없이는 이런 시를 쓸 수 없다.
그의 초기 시가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생명파 시인으로 부른다.
이 시에는 국화꽃은 특이하게 의인화되어 있다.
전통적인 우리의 시에서는 국화꽃을 지조 있는 선비에 비유한다.
그러데 서정주 시인은 국화꽃을 자신의 '누님'에 비유한다.
'누님'이라는 시어는 국화꽃에 대한 혈연적인 친근감을 표현한다.
미당은 국화옆에서의 자작시 해설에서, “젊은 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형(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미(美)의 영상…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정일(靜逸)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을
이 시에 담았음을 밝힌 바 있다.
서정주 시인의 해설이 이러하다면, 봄은 20대요 여름은 30대,
국화꽃이 피는 가을은 인생의 40대이다.
그런데 40대는 '뒤안길'이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결코 밝은 삶의 모습이 아니다.
이 시에서 ‘거울’은 절망의 세월을 살아온 성숙한 모습을 투영해 보며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반성하는 자아 성찰을 표현한 상징어다.
아마도 서정주 시인은 청춘의 뒤안길에서 방황했던
한 여인의 정신적 성숙에 대해 성찰하였을 것이다.
밤새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고민하다가 새벽에 창밖을 보는 순간
무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국화가 노오란 꽃잎을 발견한다.
비로소 국화가 피는 과정에는 무서리가 개입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누님의 젊은 날의 절망과 무서리 사이의 비유가 성립된다.
국화 한 송이가 피기 위한 과정처럼 누님의 정신적 성장에도
역시 시련과 방황이 필요했음을 깨닫는다.
이제 비로소 누님이 완숙한 여인으로 거울 앞에 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유추에 도달한다.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불안과 방황과 온갖 시련을 겪는다.
인생의 방황과 방랑 끝에 비로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마지막은 국화꽃이 피려고 잠이 오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우주적 협동의 비밀을 깨달은 순간의 감동과
설래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국화가 피기 위해 소쩍새 천둥 무서리가 존재한다.
결국 누님이 거울 앞에 돌아와 서기 위해서는 젊은 날의 시련과 방황이 필요하다.
이것은 작가 자신이 시 한 편을 완성하는 체험과 같다.
■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시인의 시<자화상> 전문
이 시의 주제는 시련을 겪으며 절망을 딛고 살아온 삶의 회고이며,
결코 좌절하지 않는 강렬한 생명의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강렬한 어조, 솔직하고 대담한 언어 구사로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역사적 진실에 도달한 작품이다.
시대적인 배경은 1930년대이며, 일제하의 절망적인 시기에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고 냉정하게 인식한다.
이 시는 서정주 시인의 파격적인 언어 구사로 유명한 문제작이며,
3연으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제1. 2연은 가난과 시련의 삶이다.
3연은 고통과 고뇌의 삶속에서도 자신의 고난과 고통을 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첫 구절은 충격적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종이었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종이었다는 것을 은밀하게 감추고 살 때는 삶이 위축된다.
그러나 숨김없이 밝히고 선언하게 되면 떳떳하고 당당한 자아가 설정된다.
서정주 시인뿐 아니라 당시 식민지하에서 종이 아닌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언 후에 그는 당당하며 절망의 늪을 빠져 나올 수 있다.
서정주 시인의 삶을 그대로 쓴 것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시는 사실을 다루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집안과 조상들은 모순된 사회 제도와 가난에 시달렸음을 표현한다.
자신의 할아버지는 동학 농민 혁명이 나던 갑오년(1894년)에
집을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할아버지는 바다에 간 것이 아니라 아마도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서정주의 아버지는 종이었기에 주인을 위해 일을 하느라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못하고있다.
이런 암울한 분위기가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는
구절로 암시된다. 궁핍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어매는 전라도 사투리이다.
한 달 동안 계속하여 풋살구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여자가 임신을 하였다는 암시한다.
아이를 임신한 자신의 어머니는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고 하지만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흙으로 바람벽 한 답답하고 어두운 공간인 황토 흙집이다.
전북 고창에 있는 그의 생가에 가면 이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생가를 복원하였지만 초가 3칸의 초라한 집이다.
어느 밤 호롱불 밑에 가난에 찌든 어린 소년이 때가 낀 까만 손톱을 하고 앉아 있다.
이 부분은 서정주 시인의 유년의 기억이다.
시는 갑자기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자신의 생애를 간단하게 요약한다.
23년간 자신의 생애를 지배한 것은 대부분이 바람이었음을 고백한 내용이다.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끊임없는 방랑이었다.
자신의 주체성이 없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시어를 그는 바람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서정주 시인의 시 자화상은 이 '바람'이라는 시어 하나로 유명하게 되었다.
시의 시작이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는
솔직하고 파격적인 언어를 구사하였던 그는
다시 스물세 해 동안 자기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는 선언한다.
여기서 바람이란 험난한 세파이며, 고단한 방랑과 절망적이었던 삶을 의미한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주체성이 없이 바람처럼 방황하고 절망을 가지고 살아 왔기에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부끄럽기만 하다고 고백한다.
이 부끄러움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 죽는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처럼 자아의 순결성에 토대를 가진 부끄러움이 아니다.
현실적 죄의식에 뿌리를 가진 부끄러움이다.
자신의 확고한 의지와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방황이나 하면서
살아왔기에 부끄러운 것이다.
남에게 본이 되는 떳떳한 일을 하지 못하는 자각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이다.
현실인식에 바탕을 두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며 삶 전체를 부끄럽게 인식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죄인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천치의 모습을 본다.
그는 당혹스런 선언을 한다.“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이다.
당당하고 단호한 어조로 지난날 어둡고 가난한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려고
방랑의 세계를 걸어왔던 삶을 반성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이제 자신은 죄인이 되건 남들에게 바보라고 놀림을 당하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고 이를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이다.
이 시는 1939년에 발표한 시이기에 23살 때 쓴 시가 증명이 된다.
23년 동안 그는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속에서 온갖 시달림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고 조롱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학을 하면서 이것이 자기가 받아야 할 죄값 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자신을 천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절망감과 자학적인 상태에서
그는 갑자기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고 선언을 한다.
지난날의 자신의 삶과 우리 역사의 시련이 겹친 과거를 회고하면서 이런 선언적 발언을 한다.
자신이 처한 시련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런 삶의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희망을 발견하게 만든다.
이런 희망은 찬란히 트여 오는 아침에 그의 이마에 얹힌 시의 이슬로 나타난다.
‘시의 이슬’이라는 시어는 절망적인 삶속에서 얻는 창조의 열매이다.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에서 피라는 시어는
고통스런 자기 번민과 열정의 몸부림이다. 즉 고뇌의 상징어다.
그러므로 피는 희망적인 창조의 열매인 이슬로 승화되어야 할 숙명을 지닌
이중적이고 모순된 존재다.
시 자화상의 마지막 또한 파격적이며 돌발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만든다.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이런 표현을 구사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당 서정주가 과연 이런 시를 어떻게 이 시기에 쓸 수 있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병든 수캐라는 시어는 정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극한 절망 속을 걸였던
서정주 시인 자신이다.
자신의 존재를 '혓바닥을 늘어뜨린 병든 수캐'에 비유하면서도
강렬한 삶의 생명적 욕구를 지닌다.
자화상에서 서정주 시인은 자신이 자화상을 쓸 때까지 20여 년의 삶을 고백하였다.
그는 이 시를 통해서 인간의 본원적 고통과 방랑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이런 대담한 고백으로부터 절망적인 삶을 희망을 지닌 생명의 열매로 변화시겼다.
■ 귀촉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여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서정주 시인의 시<귀촉도> 전문
주제는 세상 떠난 님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이다.
귀촉도는 불여귀, 자규, 두견, 소쩍새, 접동새 등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새다.
이 새의 전설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촉나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망제의 한이 서린 새를 귀촉도라고 부른다.
지금의 중국 사천성에 있었던 촉(蜀)나라에 이름이 두우(杜宇)요,
제호(帝號)를 망제(望帝)라고 하는 왕이 있었다.
어느 날 망제가 “문산”이라는 산 밑을 흐르는 강가에 나왔는데,
물에 빠져 죽은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더니, 망제 앞에 와서 눈을 뜨고 살아났다.
망제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를 궁으로 데리고 갔다.
"저는 형주 땅에 사는 별령(鼈靈)이라는 사람으로,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빠져 죽었는데,
어떻게 흐르는 물을 거슬러 여기를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망제가 생각하길, 이는 하늘이 나에게 어진 사람을 보내주신 것이라 여기고,
별령에게 집을 주고 장가를 들게 하고 우리나라 조선의 영의정 정도의 벼슬을 주어
나라일도 맡겼다. 망제는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별령은 왕군에 야욕을 품고 망제의 좌우에 있는 대신이며 하인까지도
모두 매수하여 자기 심복(心腹)으로 만든다.
그리고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별령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는데, 얼굴이 천하의 미인이었다.
별령은 이 딸을 망제에게 바친다.
망제는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모두 장인 별령에게 맡겨 버리고
밤낮 미인을 끼고 궁중에 깊이 앉아 바깥 일은 전연 모르고 지낸다.
마침내 별령은 여러 대신과 협력하여 망제를 국외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된다.
망제는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오니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죽어서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어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고 또 울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원조(怨鳥), 두우(杜宇), 귀촉도(歸蜀途)
또는 망제혼(望帝魂)이라 하여 망제의 죽은 혼이 새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서정주 시인은 이 전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전설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결합하여 변형되면서 많은 시의 소재가 되어 왔다.
고려말 이조년의 시조에 나오는 자규를 비롯하여, 김소월의 ‘접동새’,
김영랑의 ‘두견’, 조지훈의 ‘낙화에 등장하는 귀촉도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의 소쩍새 등이 바로 이 새다.
이 시는 3연으로 되어 있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세상을 떠난 님과의 영원한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서역 삼만리와 파촉 삼만리는 세상을 한번 떠나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진달래 꽃비’와 ‘흰 옷깃’은 이별의 비정함과 슬픔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시어들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그가 떠난 세상을
서역 삼만리와 파촉 삼만리로 표현하면서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다.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여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자신의 연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좀 더 잘 해 줄 것을 후회하는 내용이다.
그가 떠나고 나니 후회가 크다.
자신의 머리를 은장도로 잘라서 그의 신발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도 후회가 된다.
회한의 정과 이를 잊을 수 없는 남겨진 한 연인의 애절한 탄식어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현재적 관점에서 세상을 떠나 연인을 생각한다.
귀촉도의 한의 전설과 사랑하는 연인을 세상 떠난 것에 대한 한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초롱불도 지칠 정도로 늦은 밤까지 애타는 연모의 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은하수의 물이 너무나 멀고 깊어 목이 젖은 새인 귀촉도는 슬픔으로 울고 있다.
사랑하던 연인의 죽음은 그 어떤 슬픔보다 아픔을 동반하고 있을을 표현하고 있다.
세상 떠난 님을 향한 슬픔과 한의 상징어인 귀촉도는 피를 토하면서 울고 있는데
그 새가 자기 자신이다.
하늘 끝은 사랑하는 연인이 죽어가 가 있는 장소다.
홀로 라고 하면 될 것을 '호올로' 라고 표현한 것은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결국 이 시는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한 여인의 슬픔의 연서 같은 시다.
서정주 시인의 시는 초기에는 원색적인 관능미로 출발하였으며
오십대 이후에는 우리 전통의 미적인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기성세대 중에서 서정주시인의 시를 읽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해방 후 문단에서 그의 입지는 돈독했다.
서정주 시인도 청소년 때는 사상적인 방황 속에서 이데올로기에 심취하기도 했다.
서정주 시인은 초기에 보들레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악의미를 추구하는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을 보였다.
1938년 발간한 그의 첫 시집 화사집은 미당의 이러한 초기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토속적인 배경으로 한 인간의 원죄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관능적 욕구에 고민하는 젊음과 원죄적 세계관을 치열하게 드러내고 있다.
서정주 시인을 생명파 시인이라고 한다.
생명파는 인간 생명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적 경향이 있다.
이를 주장하는 시인들이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모였다.
서정주, 김동리 등과 유치환에 의해 주도 된다.
이들은 목적성을 강조한 프로 문학, 감각적 기교에 흐른 모더니즘, 예술적 기교를 강조한
시문학파 모두를 비판한다.
시인부락의 동인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력과 삶의 고뇌를 노래함으로써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특히 해방 후 우리 문학의 주도적인 경향을 형성하였다.
그의 중간 시세계는 동양사상의 영향으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
1948년도에 발간한 제2시집인 귀촉도에 수록된 시들이 이 시기에 해당된다.
초기시에서 보인 청춘의 열정은 순화되어 우리의 전통 가락과 한의 세계로 전환되기 시작 한다. 점점 원죄나 젊음의 방황을 극복하면서 낙천적으로 변모한다.
서정주 시인 묘소
미당의 후기 시들은 자신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선운리 질마재에 살았던
유년 시절로 회귀한다.
이 시기의 시집은 1975년 발행한 질마재 신화이다.
그는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꾼’이 된다.
농촌사회의 전통을 발굴, 질펀한 토속어로 흥미있는 이야기를 산문시를 쓴다.
말년에도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세계 여행의 체험과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1990년 시집 ‘산시(山詩)’이 발간된다.
그의 시작은 평생에 걸쳐 몇 단계를 거치면서 변용되어 왔다.
서정주 시인은 우리의 언어를 가지고 생동하는 아름다움과
처연한 그리움을 잘 표현한 작가이다.
언어의 연금술사 같은 뛰어난 장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서정주 시인이 일제하에 친일논란과 전두환 대통령 생일 때 축하시의
논란 같은 것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명실상부한 우리 현대 문학의 큰 봉우리이다.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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