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전(傳)하는 것을 보면,
黃鳥歌 황조가
翩翩黃鳥 편편황조
雌雄相依 자웅상의
念我之獨 념아지독
誰其與歸 수기여귀
꾀꼬리
훨훨 날아 오가는 꾀꼬리들이여
암수가 서로 정답네.
생각하면 나는 고독한 몸
누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거나
이 시를 지은 유리왕은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화희(禾姬)와 치희(雉姬) 두 여인을 계실(繼室)로 맞았는데,
이들은 늘 서로 쟁총(爭寵)하던 끝에 왕이 기산(箕山)에
사냥을 가 궁궐을 비운 틈에 화희가 치희를 모욕하여
한(漢)나라로 쫓아 버렸다.
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이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뒤를
쫓았으나 벌써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왕이 탄식하며 나무 밑에서 쉬는데, 짝을 지어 날아가는
황조(黃鳥 : 꾀꼬리)를 보고 감탄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되어있다.
위의 사실에 근거(根據) 한다면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2000년 전에 한시(漢詩)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우리나라의의 고시(古詩)를 살펴보면
오언고시(五言古詩)는 신라 진덕여왕이 당나라 고종(高宗)에게
화친책의 일환으로 보낸 《태평송(太平頌)》이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고구려 승려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이나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전략적으로 지어 보낸 《유수장우중문(遺隋將于仲文)》도
오언고시(五言古詩)이다.
신라 말의 최치원과 고려 초의 김부식 ·최유청(崔惟淸) 등의
고시(古詩)도 명편으로 꼽힌다.
칠언고시(七言古詩)는 원효의 시(詩)라든지 수로부인의 설화에
나오는 《해가(海歌)》 등에서 그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를 살펴보면
고려전기(高麗前期)를 대표(代表)하는 시인(詩人)으로는
박인량(朴寅亮), 김부식(金富軾), 정지상(鄭知常)이 있다.
김부식을 위시한 당시 귀족시인들의 귀족적 여유에서 나온
풍후(豊厚)한 시풍이 이 시대 한시의 특징을 이루었다.
특히 서경(西京) 출신 정지상은 서경 특유의 정조(情調)를
바탕으로 하여 화사한 시어와 활기찬 율동으로 노래했다.
고려중기(高麗中期)를 대표(代表)하는 시인(詩人)으로는
이인로(李仁老), 임춘(林椿)을 위시한 죽림고회(竹林高會) 등
무신집권시대의 구귀족 세력의 후예들과
이규보(李奎報)를 대표로 하는 신진사인(新進士人)들이 있다.
이인로는 무신정권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식과 구귀족사회에
대한 회고적 정서 속에서 시에 대한 예도적(藝道的) 인식으로
기교가 빼어난 시를 썼다.
임춘은 불우한 처지에서 자기 의식에 집착된 산문성이 강한
시풍(詩風)을 드러내었다.
이규보는 독창성을 강조하는 진취적인 창작 자세로 다양한
소재를 다루어 호일(豪逸)·동탕(動詩), 변환 자재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어 고려 일대의 시호(詩豪)로 인정된다.
그의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은 민족적 ·민중적
전승(傳承)인 동명왕 신화(東明王神話)를 고차원적으로 인식,
정열적으로 시화(詩化)한 것으로서 그 뒤 원(元)나라 군림기로
접어들면서 나온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와
함께 민족서사시의 웅편(雄篇)이다.
고려후기(高麗後期)를 대표(代表)하는 시인(詩人)으로는
혜심(慧諶)·경한(景閑)·보우(普愚) 등 승려들의 선시(禪詩)와
이제현(李齊賢),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안축(安軸), 이곡(李穀), 정도전(鄭道傳) 등이 있다.
승려들의 시작(詩作) 활동과 성리학(性理學) 수용을 지향하는
신진 사대부 층의 새로운 문화적 의욕에 의해 시사(詩史)는 보다
정신적으로 심화되면서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선시(禪詩)는 인생의 의미를 불교적으로 심화시키면서
자연(自然)에 새로운 상징(象徵) 기능을 부여했고,
원감(圓鑑)은 원(元)나라 군림하의 고려 민중의 고난을 위시하여
세속의 일들을 매우 청신한 시풍으로 표출하였다.
성리학적(性理學的) 사유에 접한 신진사대부 층은 외식적(外飾的)
기교를 극복한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의 노건(老健), 이숭인(李崇仁)의 온자(蘊藉),
정몽주(鄭夢周)의 순수(純粹)한 시풍과 이색(李穡)의 집대성적
호대(浩大)한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앞 시대의 이규보에게서 그 단초(端初)가 열린 농민현실 고발과
같은 사회시(社會詩)의 전통이 이 시대의 안축(安軸), 이곡(李穀)
등에게도 이어졌으며 이색은 또 일련의 민속시(民俗詩)를 남기기도
했다.
이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정도전(鄭道傳)의 밝고
역동적인 리듬을 가진 시세계(詩世界)는 그의 혁명적 진취성의
시적(詩的) 발현이다.
이제현과 민사평(閔思平)에 의한 고려 속요(俗謠)의 한역(漢譯)이
《소악부(小樂府)》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
한시(漢詩)의 자국(自國) 민간가요 세계에의 접촉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意味)를 가진다. 그리고 시사적(詩史的) 축적으로
이 시기에 조운흘(趙云媛)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등
두세 가지 선집(選集)이 나오기도 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를 살펴보면
조선전기(朝鮮前期)는
서거정(徐居正), 강희맹(姜希孟), 김시습(金時習), 김종직(金宗直),
이행(李荇), 박은(朴誾), 어무적(魚無迹) 등이 있다.
사대부 층의 자기분화(自己分化)에 의한 상이한 성격과 체질을 가진
그룹들의 존재를 배경으로 다양한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조선 왕조 체제를 수립하고 15세기 역사의 주역이 되었던
훈구관료계(勳舊官僚系)는 대체로 문학의 표현이나 장식적인 기능을
존중하는 태도로 창작에 임했는데, 이 계열의 전형적인 존재인
서거정(徐居正)은 다분히 유한적(遊閑的)인 기분으로 감각적인
이미지와 교묘한 시어를 구사하여 화미(華美)·부염(富艶)의 미학을
지어내었고 같은 시기의 강희맹(姜希孟)은 그의 전원(田園) 생활의
체험에서 민요의 세계를 작품화하기도 했으나 귀족적인
한아(閑雅)의 시경(詩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현(成俔)의 시는 주정성(主情性), 낭만성을 띠면서도 불우한
서민생활을 그려 보이는 등 작품세계의 폭을 넓혀나갔다.
체제에서 일탈(逸脫)된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방외인계(方外人系)의
대표적 인물인 김시습(金時習)의 시세계(詩世界)는
초일(超逸)한 심회와 고원한 포부가 읊어지기도 하였으며,
재야(在野) 세력으로 남아 있다가 사림계(士林系)의 선두로 중앙에
진출한 김종직(金宗直)은 중후하고도 역동적인 시풍으로 유명했다.
조선 초기의 시에는 중국 송시(宋詩)의 영향이 현저했던 편이었는데
이런 경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시인은 이행(李荇)과 박은(朴誾)으로,
이들을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라고 불렀다.
관노(官奴) 출신 어무적(魚無迹)이 지배층에의 강렬한 저항 시편을
남겨 이 시기의 시사상 특이한 존재로 떠올랐다.
관찬(官撰)으로 성종 때 이루어진 《동문선(東文選)》과 중종 때
이루어진 《속동문선(續東文選)》의 시 부분과 김종직의
《청구풍아(靑邱風雅)》는 이 시대의 주요 시선집이다.
16세기에 들어와
서경덕(徐敬德),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정철(鄭澈),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 임제(林悌), 허균(許筠), 권필(權糧) 등이 있고,
황진이(黃眞伊), 이매창(李梅窓), 이옥봉(李玉峰),
신사임당(申師任堂), 허난설헌(許蘭雪軒) 등의 여류 시인(詩人)들이
활동(活動)하였다.
사림파의 정치적 역할이 증대되고 도학(道學)의 학문적 탐구와
실천적 지향이 보다 본격화되면서 시사에도 새로운 조류가
대두되었다.
서경덕(徐敬德),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이
이 새로운 조류를 대표한다.
송익필(宋翼弼)은 미천한 신분 출신이면서도 도학파와의 연계에서
달관의 인생관을 시로 표출하였고,
정철(鄭澈)은 그의 국문시가와의 대비에서 한시가 떨어지는
편이어서 한국 한시의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 셈이다.
송시(宋詩)의 사변성(思辨性), 기교성(技巧性)과 도학파시의
도덕적 제어성(制御性)에 반발하여 이를 극복하려 당시(唐詩)를
배워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을 지향하는 운동이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에 의해 주도되어
이들을 '삼당(三唐)'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삼당의 시풍은 임제(林悌)에게 이르러 한층 분방하게
나타났으며 허균(許筠)에게로 이어졌다.
허균(許筠)은 조선왕조 한시의 선집인 《국조시산(國朝詩刪)》을
내어놓기도 하였다.
권필(權糧)은 청려(淸麗)한 시풍으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는데
불우한 생애로 강한 현실부정의식을 지니고 있어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을 풍자한 시로 필화(筆禍)를 당해
죽었다. 이 시대 시사에서 특기할 만한 다른 한 가지는
여류 시인들의 작품활동이다.
이들은 모두 천부적인 시재를 타고난 출중한 규수시인이었으며
여성만이 표현할 수 있는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다.
조선후기(朝鮮後期)에는
박지원(朴趾源), 정약용(丁若鏞), 신광수(申光洙),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학규(李學逵), 이익(李瀷) 등이
있다.
한자로 시심을 표현하는 한시에는 다양한 주제의 시가 등장합니다.
자연의 경치를 묘사하는 서경시(敍景詩), 특정한 주제에 대한
시인의 정서와 감회를 노래하는 서정시(抒情詩), 역사적인 사실을 묘사하며
경우에 따라 시인 자신의 평가를 곁들이는 영사시(詠史詩), 사람과의 이별을
노래하는 전별시(傳別詩)가 있는가 하면, 자연이나 인간사를 냉소적 시각에서
바라보며 이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풍자시(諷刺詩), 자신의 수양이나 자손들에게
삶의 가르침을 나타내 주는 교훈시(敎訓詩), 죽음 직전에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감정을 압축해 토해 내는 절명시(絶命詩)의 숙연함도 있다.
한시의 상당한 숫자는 선비들이 자신의 몸가짐이나 구도에의 열정과 자연친화적인
감정을 노래하는 도학풍(道學風)의 시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축적된 한시는 이밖에도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내용도
다수 전해 내려 옵니다.
오늘은 역시 고려조의 문신인 정포선생의 칠언절구 한수를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을 노래하는 전별시의 일종인데, 제목이 양주객관별정인(梁州客館別情人)
으로 우리말로 옮기면 “양주의 여관에서 정인을 이별함”으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五 更 燈 燭 照 殘 粧 (오경등촉조잔장)
欲 話 別 離 先 斷 腸 (욕화별리선단장)
落 月 半 庭 推 戶 出 (낙월반정퇴호출)
杏 花 踈 影 滿 衣 裳 (행화소영만의상)
새벽 등불은 여인의 화장 자국 비춰 주는데,
작별을 고하려는 나의 애가 끊어지는 듯,
달빛어린 뜰에서 문 열고 집을 나서려 하니,
살구꽃 그림자는 온 몸을 감싸 주네.
(어휘풀이)
五更 :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 殘粧 : 남아있는 화장 자국
欲 : ~ 하고자 하다 欲話 / 말하고자 하다.
斷腸 : 창자를 끊어내다(고통의 절정을 표현하는 말)
落月 : 지는 달, 새벽달 半庭 : 뜰의 절반 /滿庭은 뜰안 가득
推戶 : 문을 밀어내다. 杏 : 살구 踈影 : 그림자
(지은이)
정포(鄭誧), 字는 중부(仲孚), 號는 설곡(雪谷). 1309년에 태어나서 1345년 36세로 별세하다.
1326년 문과에 급제후 예문수찬(藝文修撰), 좌사간(左司諫), 전리총랑(典理摠郞)등의 벼슬을 지내다.
정사의 쇄신과 국정의 개혁을 상소 후 면직되어 경상도 울주(蔚州)에 귀양가다.
석방후 원나라 연경에 들어가 지내든 중 젊은 나이로 병사하신 분입니다.
시와 문장에 능한 분이며 저서에 “雪谷集”이 있다.